노력에 대하여

히드라와 맞서싸우는 헤라클레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신 헤라클레스는 그의 운명적인 과업을 수행하던 중 히드라라고 불리는 괴물과 맞서 싸우게 된다. 

 

히드라의 가장 큰 특징은 머리가 절단되면 그 머리에서 두 개의 머리가 재생된다는 점이다. 히드라의 특성에 대한 고려 없이 신에게 축복받은 무력을 사용해 히드라의 목을 벤 헤라클레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머리를 증식시킨 히드라였다.

 

 

 

 철학자이자 투자자인 나심 탈레브는 이러한 히드라의 특성으로부터 안티프래질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깨지기 쉬운 이라는 뜻의 프래질(Fragile)에 반대를 뜻하는 안티가 접한 단어이다.

한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점은 잘 깨진다는 뜻의 반의어인 안티프래질은 잘 깨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안티프래질은 어떤 부분에서 프래질한 특성과 구분되는 것일까? 그것은 회복력의 차이일 것이다. 프래질한 것들은 부서지고 나서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이전보다는 조약 해지거나 약해진다. 깨진 유리잔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유리잔이 깨지고 나서 이 유리잔을 복구한다면 아무리 정교하게 복구한다고 한들 이전에 비해서 조약 해지거나 결함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유리잔은 프래질하다.

 


반대로 안티프래질 한 것의 예시로는 굳은살이 있다. 굳은살은 쉽게 파괴된다. 이 점에서는 유리잔과 동일하다. 하지만 파괴후 살이 다시 재생될 때 더 강인한 굳은살을 만들어낸다. 마치 머리가 잘리면 복수의 머리를 재생하는 히드라처럼 말이다. 파괴되면 퇴화하는 유리잔과는 구분되는 특성이다.

 

안티프래질 한 특성이 있는 것이 만약 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생명체라면 그들은 적당한 수준의 고통을 탐닉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닌 사람 또한 있겠지만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안티프래질 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적당한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러한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강인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축적되면 둘 사이 간의 차이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라고 믿는다.

최근 우리사회는 고통을 피하는 것을 권장한다. 많은 사람이 고통 없이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는 비법을 찾아다니고 약간의 고통마저도 회피하고자 한다. 물론 그러한 태도는 지성이 있는 생명체로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며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든 그렇듯이 그것이 너무 극단적이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실패와 고통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한다. 절대 실패하지 않을 계획을 갈구하고 항상 배움에 목말라있다. 하지만 그 계획이나 지식을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 결과 그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성장하지도 못한다. 반대로 큰 계획을 세우되 빠르게 행동해 그 계획을 향해 묵묵히 전진하며 쓰러져 보고 일어서도 본 사람들은 훨씬 더 강인해진다.

 

시간이 지났을 때 전자의 유형은 머리가 하나 달린 초라한 히드라로 남아있을 것이고 후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머리를 갖게 될 것이다.

이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생각하는 어쩌면 무책임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정보의 홍수는 우리에게 명료함을 앗아갔다. SNS와 대중매체의 발달은 우리를 계속 위축시킨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머리를 가지고 있는 히드라에 비해 거울에 비친, 타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들은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하다. 그렇기에 그러한 격차를 순식간에 좁힐 수 있는 비책만을 강구한다. 애당초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히드라들은 상위로 치자면 소수점 단위에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판에 박힌 이야기이지만 나의 최대 적은 어제의 나다. 어제 머리가 하나였다면 오늘은 머리가 두 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내일은 4개가 되는 것을 또는 4개가 될 수 있도록 부딪혀 보는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그 일이 얼마나 지루하고 괴로울지는 몰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물론 너무 극단적으로 고통을 탐닉하는 것은 또 피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요즈음 젊은 세대에 만연한 고통을 극단적으로 피하는 태도가 생겨나게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극단적으로 고통을 강요하던 기성세대의 반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여러 개 달린 히드라의 목을 베는 것에 지친 헤라클레스는 불을 이용하여 히드라를 아예 태워버린다. 히드라는 베이는 것에는 안티프래질 했지만, 불이라고 하는 것에는 프래질했던 것이다. 이처럼 회복할 수 없는 극단적인 고통은 우리를 강하게 하기는커녕 우리를 영원히 파괴해 버린다.

 

이런 고통은 가까이에도 가서는 안된다. 철학자인 니체는 앞서 말한 내용을 “나를 파괴할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 라는 경구로 우아하게 풀어냈는데  일부 사람들은 이 잠언을 고통을 탐닉하라는 식으로만 해석하고는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경구는 나를 파괴시킬 정도의 고통은 피하라는 뜻을 담고있다. 

 

결론을 정리하자면 나를 파괴할 정도의 고통은 항상 피해야 한다. 하지만 나를 파괴하지 않을 정도의 고통은 오히려 찾아다녀야 한다